우리집엔 공주님이 산다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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공업탑 독자 김동석

요즘 우리 집은 그야말로 ‘소리 없는 전쟁터’입니다.

 겉으론 평온하지만, 그 안에 흐르는 긴장감은 만만치 않지요. 

어느새 우리 집엔 새로운 계급 체계가 생겼습니다. 

왕도 없고, 왕비도 없고, 오직 절대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단 한 사람. 

고3 공주님이 계십니다.

딸이 고3이 된 순간, 집안의 모든 질서는 재편되었습니다.

가족회의? 생일 파티? 중요한 결정? 그런 건 모두 잠시 보류입니다. 

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미션은 단 하나. “공주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.”

아침은 늘 딸의 기분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. 

침실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 끝에 조심스레 문을 두드립니다.

“딸, 일어날 시간이야~” 

그러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신음 같은 소리.

“으으으으으…” 이게 ‘더 자고 싶다’는 뜻인지,

‘이미 깼지만 말 걸지 말라’는 신호인지 해석이 필요합니다. 

이럴 때 저는 고도의 직관력과 순발력을 발휘하죠. 

‘공주님 모시기’는 밤에도 끝나지 않습니다.

“아빠~ 라면!” 

한밤중, 

딸이 야식이 당긴다고 부르면 저는 지체 없이 셰프 모드로 전환됩니다.

 냄비를 올리고, 수프를 붓고, 면을 투하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

 ‘공주님 취향’은 철저히 반영되어야 하죠. 

국물의 농도, 면발의 익힘 정도, 심지어 달걀 반숙의 익힘 정도까지. 

지난주엔 반숙이 10초 정도 과했다는 이유로 라면이 반품되는 사태도 있었습니다.

그러나 이 모든 고단함 속에도 보석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. 

가끔 딸이 공부하다 말고, “아빠, 고마워.”하고 툭 내뱉는 그 한마디. 

그 말에 난 또 울컥합니다. 

그동안의 수고와 긴장이 눈 녹듯 사라지며, 마음 한편이 뭉클해집니다.

우리 딸은 지금 인생의 가장 치열한 시간 중 하나인 ‘고3’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. 

어쩌면 모두가 거쳐야 할 관문. 

언젠가 대학에 합격하고, 그 끝에서 햇살 같은 웃음을 지을 날이 오겠지요. 

그때 지금의 사소한 다툼과 긴장도 따뜻한 추억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.

그래서 오늘도 우리 부부는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합니다.

“공주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.”

 그것이 우리가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가장 현명한 방식이니까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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